https://www.youtube.com/watch?v=UeWDgjTBaYg&ab_channel=AllNationsChurch
(마가복음 10:46-52)
1.ORATIO(비움)
-> 하나님, 저의 Pre-Knowledge(선지식), Pre-Judgement(편견), Pre-Conception(선입관)을 비워주소서
하나님, 말씀이 삶이 되게 하시고, 삶이 말씀으로 증거되게 하소서
2.Meditatio(채움)
-> 마가복음 10:46-52은 크게 3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 크게 소리 질러 부트짖는 바디메오 (46-48)
둘째, 겉옷을 내버리고 예수께 달려가는 바디메오(49-50)
셋째, 자기의 소원을 당당하게 말하는 바디메오 (51-52)
(1)관찰
첫째, 크게 소리 질러 부트짖는 바디메오 (46-48)
예수께서 여리고에 이르렀다가 나가실 때에 맹인 바디메오가 길 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맹인이다보니 일을 할 수 없어서 아마도 성전미문 앞 앉은뱅이처럼 구걸을 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바디메오는 ‘나사렛 예수’가 자기 앞을 지나가고 있다는 소리를 듣자 소리 질러 예수께 이렇게 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48절)
둘째, 겉옷을 내버리고 예수께 달려가는 바디메오(49-50)
예수께서 바디메오의 부르짖음에 반응하십니다.
‘그를 부르라’(49절)
사람들이 바디메오를 부르며 말합니다.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49절)
그 때 바디메오가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갑니다. (50절)
셋째, 자기의 소원을 당당하게 말하는 바디메오 (51-52)
예수께 바디메오가 달려오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51절)
바디메오가 대답합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51절)
예수께서 말합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52절)
그는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릅니다.
(2)새김
첫째, 크게 소리 질러 부트짖는 바디메오 (46-48)
1)여리고는 예루살렘의 위성도시입니다. 세리를 비롯하여 예루살렘의 관원들이 살던 곳입니다.
성경에서 여리고를 설명할 때 ‘내려갈 때’라는 말을 합니다. 거룩한 예루살렘에서 세속적인 여리고로 내려가는 상징적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선한사마리아인을 비유를 드실 때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이 강도를 만납니다.
그런 그곳에서 예수는 바디메오를 만납니다.
바디메오는 이름이 아닙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무시한 맹인이었습니다.
‘바’는 ‘아들’이라는 뜻으로, 바디메오는 ‘디메오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름도 소개되지 않는 무명의 사람이 예수가 지나가자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이름만으로도 그 사람의 현재 삶의 비참한 상황을 보여줍니다.
부모에게서 형제에게서도 버립받은 사람입니다.
맹인이 생계를 유지하는 길은 오로지 ‘구걸’ 하는 일이었고, 바디메오가 그렇게 생존했습니다.
바디메오는 한번이 아니라 사람들이 떠들지 말라고 꾸짖자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외쳤습니다.
2)바디메오의 태도에서 많은 감동을 받지만 특별히 그가 생각하는 ‘예수란 누구인가’가 참 감동입니다.
47절을 보면 사람들은 예수를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바디메오는 예수를 부를 때 이렇게 부릅니다.
(막 10: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나는 예수를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를 ‘구원자’로 부르는데, 혹시 그냥 ‘나사렛’ 예수로 부르고 있는지 회개합니다.
바디메오는 특별히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칩니다.
아마도 절규였을 것입니다!
나에게 이런 절박한 부르짖음이 있나 생각해보지만, 바디메오처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둘째, 겉옷을 내버리고 예수께 달려가는 바디메오(49-5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는 하시고 바디메오를 불러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라는 말을 하자 바디메오의 반응이 아름답습니다.
(막 10: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겉옷은 맹인의 전재산이다시피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내버렸습니다. 예수에 대한 확신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뛰어 일어나예수께 나아갑니다.
맹인인 사람이 예수께 뛰어 일어난다…. 굉장한 믿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행동입니다.
바디메오에게는 ‘예수 밖에 없다’는 절박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냥 나사렛 예수가 아니라 ‘다윗의 언약’에 기초한 ‘다윗의 자손’ 예수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마가복음에는 맹인에 대한 이야기 소개가 처음이 아닙니다.
(막 8:22-23)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바디메오는 우연히 지나가시는 예수를 만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의 소문을 들었고 그래서 예수를 만나기 위해 ‘그 자리’에서 에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리고에서 예수를 기다렸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입니다. 그는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뽕나무에서 예수를 기다렸습니다.
(눅 19: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나의 인생 앞으로도 예수가 지나가시는 날이 옵니다.
그때 그 예수를 ‘나사렛 예수’ 곧 고향에서 배격당하는 예수가 아니라, 성경에서 기다리던 예수 ‘다윗의 자손 예수’를 바디메오처럼, 삭개오처럼 ‘갈망하고 기다리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여리고에 예수가 필요한 사람들이 단지 바디메오 한 사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정말 수많은 사람이 예수를 만지기를 소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디메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 밖에 내게 희망이 없다는 간절함‘이 바디메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자기의 소원을 당당하게 말하는 바디메오 (51-52)
예수께서 바디메오에게 말도 안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51절)
바디메오는 명확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주 분명하게 자기의 소원을 예수께 고합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51절)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미문 앞 앉은뱅이 거지를 치료할 때를 생각하면 바디메오는 예수에 대한 분명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앉은뱅이는 금과 은을 구했지만, 바디메오는 예수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예수께로부터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는 질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뭐라고 대답할까요?
‘필요한 것을 구하는 믿음’이 바디메오에게 있었습니다!
갑자기 예수께서 질문하실 때 바로 필요한 것을 구한다는 것은 평소에 늘 기도제목으로 삼았다는 증거입니다.
바디메오는 ‘부자되는 것’이 필요한 기도제목이 아니었습니다.
‘편안함‘이 필요한 기도제목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무시하는 사람들에 대한 ‘복수’가 필요한 기도제목이 아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처럼 예수의 좌우에 앉기를 바라는 ‘욕망’이 필요한 기도제목이 아니었습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I want to see!’
찬송가 작사가인 패니 크로스비는 우리가 아는대로 맹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의 눈이 밝았던 분이십니다.
그분의 찬양가사처럼 우리의 눈이 ‘기업’(company)이 아니라 ‘기업’(inheritance)을 원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3)기도
1)주님, 나사렛 예수가 아니라 다윗의 자손 예수를 원하나이다.
2)주님, 제 인생에서는 오직 예수만 필요합니다.
3)주님, 페니 크로스비처럼 ‘영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3.TENTATIO(나눔)
1)예수에 대해서 좀 더 바르게 알아 갈 수 있도록 하자
2)예수아니면 희망이 없는 켄싱턴거리의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하자
3)뉴저지열방교회가 ‘기업’(company)이 아니라, ‘기업’(inheritance)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