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s3gcPGcPEh0 오두막 107번째 이야기 – ‘개인주의자 문유석 판사, 개인주의자 나사렛 예수’ 오늘 소개하는 일반서적은 문유석 판사님이 쓴 ‘개인주의자 선언’이고, 신앙서적은 옥타비우스 윈슬로우가 쓴 ‘예수생각’ 입니다. 먼저 문유석 판사님은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이자 ‘미스 함무라비’ ‘판사유감’을 쓴 작가로서 자신의 프롤로그에도 썼지만 ‘유아적인 이기주의나 사회를 거부하는 고립주의와는 다른 개인주의’를 주창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 19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개인주의를 설명합니다. “세상과 전면적인 관계를 맺고 싶지는 않다’가 내 초기 상태다. 사춘기 소년이 아니니까 ‘세상과 일체의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는 아니다. 그건 불가능한 망상이다. 다만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싶다. 내 공간을 침해받고 싶지 않은 것이 내 본능이고 솔직한 욕망이다.” 다만 제가 이 책을 쭉 읽어가면서 느낀 문유석 판사님이라는 인물은 ‘사람을 사랑하는 개인주의자’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고2때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통해서 80년 광주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는 세상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은 후 이문열 유의 순수문학 취미에서 벗어나…” (p.98) “그동안 그리 넉넉하지 못한 서민 가정에서 자랐다고 생각했던 내게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은 큰 부끄러움을 주었다…. 공장 프레스 기계에 잘려나간 동료의 손을 들고 타이탄 트럭 짐캄에 앉아 병원에 갔지만 붙이지 못한 채 결국 공장 담벼락 아래 묻은 내용의 시 ‘손무덤’을 읽으며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pp.98-99) 특별히 그가 판사로서 법정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회고는 ‘사람을 생각하고 사는 진정한 법조인’이라 생각되었습니다. “법정은 전쟁터다. 상대는 인간 말종 사기꾼이고 나는 순결하고 억울한 희생자다. 법정에서 억울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런 전쟁터에서 판사나 조정위원의 중재하에 대화를…” (p.170) 결국 그가 말하는 개인주의자라는 정의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사람을 사랑하는 개인주의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행복의 기원의 작가) 서은국 교수에 따르면, 행복감이란 결국 뇌에서 느끼는 쾌감이다. 뇌가 특정한 종류의 경험들에 대해 기쁨, 즐거움, 설렘 등의 쾌감을 느끼도록 진화한 것이다. 그런데 실증적 연구 결과, 인간이 행복감을 가장 많이, 자주 느끼는 원천은 바로 인간이었다. 가족, 연인, 친구, 동료… 인간은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많은 쾌감을 느끼는 뼛속까지 사회적인 동물이었던 것이다. 돈은 어느 정도의 문화적 생활이 가능한 수준을 넘어서면 행복감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p.51) “문제는 본말이 전도되어 매개체인 돈, 지위 등 자체에 집착하게 된다는 점이다. 돈을 벌든 높은 자리에 오르든 박사가 되든 그걸 같이 기뻐해주고 인정해주는 사람들의 무리에 속해 있을 때 뇌의 행복 중추에 불이 번쩍번쩍 들어오는 것이지…” (p.53) “결국 우리가 더 불행한 이유인 수직적 가치관을 버리고 수평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얘기다.” (p.55) 문유석 판사님의 ‘사람을 사랑하는 개인주의자’에 대한 이야기를 신앙적으로 잘 설명해 주는 책이 있습니다. 바로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목사님의 ‘예수생각’입니다. ‘예수생각’의 영어제목은 ‘Consider Jesus로서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생각’의 저자인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목사님은 31개의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에 맞게 대답을 제시할 때에 이런 말을 꼭 합니다. ‘에수님을 생각하세요’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목사님은 별명을 ‘청교도의 벗’이라고 얻을 만큼 챨스 스펄전과 J.C.라일과 함게 19세기에 가장 유명한 복음주의 설교자입니다. 특별히 그 당시 그의 위치와 영향력을 좀 설명하기 위하여 예를 한가지 들면 챨스 스펄전목사님께서 메트로폴리탄 태버너클에서 첫 예배를 드릴 때 강단에 초청될 만큼 매우 유명한 설교자였습니다.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목사님은 예수님에 대하여 31가지를 설명하면서 문유석 판사님처럼 예수님을 ‘개인주의자’로 소개합니다. “그리스도의 영향력은 매우 개인적이었습니다. 그분의 삶은 뚜렷한 특징을 지녔습니다. 그 특징은 그분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강력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군중에 파묻혀 살아갑니다. 대중을 따르고 대중에 이끌려 행동합니다…. 할란 페이지는 일기장에 ‘개인으로 살고 행동하기로 결심한다’고 적었습니다…. 개인으로서 지닌 책임과 의무, 영향력은 교회나 사회, 다른 개인에게 양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개인으로 태어나 개인으로 살다가 개인으로 죽어 개인으로 심판받습니다.” (pp.30-31) 그러면서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사람을 사랑하는 개인주의자’이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아무리 비천한 사람도 최소한 몇몇 사람의 생각과 감정, 인격에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지위가 높든 낮든, 가난하든 부하든 우리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그런 영향력을 통해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인격과 견해가 형성되고 운명이 결정됩니다.” (p.29) 위의 글을 적다보니 문유석 판사님의 글이 다시 생각납니다. “행복감이란 결국 뇌에서 느끼는 쾌감이다. 뇌가 특정한 종류의 경험들에 대해 기쁨, 즐거움, 설렘 등의 쾌감을 느끼도록 진화한 것이다. 그런데 실증적 연구 결과, 인간이 행복감을 가장 많이, 자주 느끼는 원천은 바로 인간이었다….” (p.51) 오늘은 부쩍 전쟁터와 같은 법정에서 일하는 분들을 위해 기도가 나옵니다. 특별히 제게 책을 보내주시는 나경 판사님과 최연석변호사님을 위해 기도합니다. 아무쪼록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처럼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시는 ‘온 인류의 구원자’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더불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생각하시는 ‘사람을 사랑하시는 개인주의자’ 예수님을 생각하며 오늘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주의 종’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특별히 문유석 판사님이 쓰신 글이 생각납니다. ( 물론 '같은 글, 다른 의미'로 제가 글을 쓰고는 있지만^^ ) “결국 우리가 더 불행한 이유인 수직적 가치관을 버리고 수평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얘기다.” (p.55) 성육신 하셔서 '수직적 가치관'도 승화시키시고 또 성육신 하셔서 '수평적 가치관'을 몸소 체육화 시키신 예수님의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을 실천해가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