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막 113번째 이야기 - '우린 왜 공허한 십자가에 묶여 있기만 바라는가!'
오늘 소개하는 일반서적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공허한 십자가'이고, 신앙서적은 마르틴 엥엘의 '십자가 처형' 입니다.
먼저 소개하는 '공허한 십자가'의 저자 히가시노 게이고는 언젠가 오두막에서 소개할 책인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등을 쓴 다작의 작가로서 '공허한 십자가'는 '사형제도'에 대한 찬반논쟁을 불러일으킨 문제작입니다.
내용은 대략 이러합니다. 나카하라 부부의 8살 외동딸이 강도에 의해서 살해되는 비극을 당하게 되는데 살인범은 이전의 강도살인 범죄로 징역살이를 하다가 모범수로 감형 받아 가석방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이후 나카하라 부부는 딸을 죽인 살인범에 대한 적개심이 마음에 가득차게 되고 그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지는 것이 그들의 지상과제가 되어버렸습니다.
"변호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니카하라는 화가 난다기보다 어이가 없었다. 왜 이사람은 히루카와를 구하려고 이렇게 기를 쓰는 것일까? 왜 사형을 피하게 하려고 이렇게 노력하는 것일까? 만약 그의 아이가 똑같은 꼴을 당해도 범인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 애를 쓸까?" (p.84)
"만약 최초의 사건에서 히루카와를 사형에 처했다면 내 딸은 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p.212)
결국 두 부부의 노력으로 딸의 살인범은 사형에 처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소설의 줄거리를 아주 간략하게 정리하여 말한다면.... 딸을 잃어버린 고통은 부부를 이혼하게 하고... 이혼한 아내는 '살해사건'을 취재하는 기자로 계속해서 살아가게 되고... 취재하던 중에 한 노인에게 살해를 또 당하게 되고... 살해 당한 이유가 자신의 사위가 중학교 3학년 때 중학교 2학년 여자친구와 낳은 아이를 살해 유기했다는 기사를 쓰려고 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고.... 대충 이러합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고나서 '제목'과 연관된 내용을 만나 읽는 순간 제 머릿속에서는 참으로 많은 질문들이 마음에서 튀어나왔습니다.
'공허한 십자가'...
사실 목사로서 '제목'에 이끌려서 구입한 책이어서 그랬는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무척 궁금했었습니다.
"대체 누가 '이 살인범은 교도소에 몇 년만 있으면 참사람이 된다'고 단언 할 수 있을까? 살인자를 공허한 십자가에 묶어두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p.212)
그렇습니다. 제가 이해한 '공허한 십자가'의 의미는 '살인자' 곧 '죄'에 대한 값을 제대로 치루지 않아서 언제든지 또 같은 죄를 반복해서 저지를 수 있도록 한 '의미없는' 십자가로 이해되었습니다.
"사형 폐지론자의 눈에는 범죄 피해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P.188)
"유족은 단순히 복수를 하기 위해 범인의 사형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한번 상상해보기 바란다. 가족이 살해당한 사람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큰 고통을 견뎌야 하는지……. 범인이 죽는다고 해서 피해자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유족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을 손에 넣으면 가슴 속에 쌓인 응어리를 풀 수 있는가? 사형을 원하는 것은 그것 말고는 유족의 마음을 풀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사형을 폐지한다면, 그렇다면 그 대신 유족에게 무엇을 줄 것인지 묻고 싶다." (P.188)
"사람을 죽이면 사형에 처한다 - 이 판단의 최대 장점은 그 범인은 이제 누구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P.213)
위의 내용을 읽는 순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떠 올랐습니다.
'우리' 아니 '나 전우철의 죄값'을 치루기 위하여 '공허한 십자가'에 '묶여만 있지 아니하시고'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십자가'이고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신' 예수님의 처형이 생각납니다.
'공허한 십자가'에 대하여 신앙서적으로 잘 대답해 줄 수 있는 책 '십자가의 처형'의 저자인 마르틴 헹엘은 튀빙엔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신구약중간시대와 교부시대'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신학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책 '십자가의 처형'은 성경 외 문헌들과 신화에 나타난 다양한 십자가와 그와 비슷한 죽음들을 추적하고 탐색하여 흔한 시대였든 흔하지 않은 시대였던 간에 십자가 처형이 가장 극악하고 수치스러운 형벌이었음을 잘 정리해 놓았습니다.
특별히 책의 마지막 부분인 제12장 요약및 결론에서 '그리스-로마 세계의 십자가형 사용에 관한 간략한 정리'에서 '공허한 십자가'가 아닌 '진짜 십자가'의 의미를 10가지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중의 몇가지가 이러합니다.
#3. 십자가 처형이 사용된 주된 근거는, 추정컨데, 이를 공개적으로 시행했을 때에 얻을 수 있는 범죄 억제책으로서 최대의 효과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p.176)
#4. 더불어 십자가형은 원초적인 복수심을 만족시켰을 뿐 아니라 각각의 통치자들이나 대중들의 사디즘적인 잔인함을 만족시켰다. (p.177)
#6. 십자가에서 처형된 자에게 이따금 매장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점은 이 형벌의 가혹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p.178)
#9.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에 괸한 최초가 기독교의 메시지는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 자들의 고통을 하나님의 사랑과 '결속' 시킨다. (p.177)
이런 글을 읽다가 다시 이런 질문을 제 스스로에게 던지게 됩니다.
"전목사, 너는 이제 그만 공허한 십자가에 묶여 있기만 하지 말고, 예수님처럼 과감하게 십자가에 처형되어라! 그래서 예수님이 명령하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당당하게 따라가라!"
참 그동안 아주 오랫동안 전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시늉만 하면서 목회의 현장에서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결속시키는 '십자가의 메시지' '기독교의 메시지'를 제 몸으로 채화시키지 못하고 '허무하게' 묶여만 있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의 마지막 페이지의 글처럼 나의 신학과 설교를 반성하며 '허무한 십자가'가 아니라 '완전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또 나 자신도 '완전한 십자가'에 달려 죽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시대의 신학적인 추론에 따르면, 인간이자 메시야이신 예수의 독특한 죽음의 형태가 거리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람들은 이 거리낌을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 약화시키고, 해소하여, 길들이려 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학적 반성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고대시대에 십자가형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반추해보는 것은 오늘날 신학과 설교에서 종종 간과하는 실체에 대한 중대한 상실을 극복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p.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