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C_xNFx0eTpw
‘
여인’의 깨진 옥합, ‘가롯유다’의 단단한 옥합
(마가복음 14:1-11)
마가복음 14장 1-11절의 말씀은 한 여인이 자신의 옥합을 깨고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이틀전의 사건입니다. (1절)
예수님이 ‘가난한자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다니 마을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고 계셨을 때 여인이 옥합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2절)
이 사건을 주목하던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었습니다. 화를 낸 이유는 300데나리온 이상의 가치를 가진 순전한 나드를 허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4절)
그들은 그 여인을 강하게 책망합니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5절)
이 때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변호인이 되셔서 도리어 어떤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막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왜 그들을 책망하셨습니까?
소위 제자라는 자들에게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에) 여러번 ‘십자가의 죽음’을 이야기 했음에도 불구하고 망각하는 모습에 싫망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제자들 곁에 있기에 섬길 수 있지만, 자신은 곧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여 더이상 같이 할 수 없음에도 함께 마음을 같이 하지 않는 제자들에게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엄청난 축복을 이 여인에게 합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항상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기억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과연 이 여인의 행동을 책망한 ‘어떤 사람들’은 누구일까?
성경은 직접적으로 지적하고 있지는 않지만, 10절과 11절을 읽다보면 그들 중의 한명이라 생각되는 인물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로 가롯유다입니다.
(막 14:10)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좋게 포장하면, 아마도 가롯유다는 예수님께 많이 싫망한 것 같습니다.
일년치 노동자의 월급을 가난한 자들이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쏟아 붓게하는 예수님께 분노를 느낀 것 같습니다.
그런에 이게 fact 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아니 아닙니다.
그에게도 옥합이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도 옥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옥합은 여인의 옥합과는 다르게 ‘어떤 상황’에도 절대로 깨지지 않는 옥합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위한 ‘깨뜨려지는 옥합’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팔아서 남긴 돈을 쌓아두기 위한 ‘절대로 깨뜨려지지 않는 옥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가롯유다 마음에 ‘돈’이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돈’의 향방에 따라 자신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막 14:11)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이 여인의 옥합이야기’만 기억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롯유다의 이야기’도 함께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두고 ‘나의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로 기록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이야기를 쓰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틀 후에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맞이하게 됩니다.
오늘 내일 ‘가롯 유다의 이야기’를 쓰는 우리가 아니라, ‘여인의 옥합이야기’를 써 가는 열방식구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마 6:2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