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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잠시’ 넘어졌지만 ‘아주’ 넘어지지 않았던 힘!
(마가복음 14:66-72)
마가복음 14장 66-72절의 내용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처럼 닭이 두번 울기전에 세번 부인하고 우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본문에서 받은 레마의 말씀은 ‘왜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하게 되었나’ 입니다.
1)베드로는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갔습니다.
(마 26: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예수님과 왜 거리 간격을 두었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손해를 보거나, 취조를 당하거나, 십자가에 달리는 고통을 당하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늘 베드로가 예수님과 간격을 두고 멀찍이 따라다녔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고 배고픈 자에게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실 때 그 어떤 제자보다 예수님 곁에 바짝 붙어서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던 인물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3-35절을 보면 베드로 뿐만아니라 모든 제자들의 ‘거짓 맹세’가 들어주기 힘들 정도입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33절)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35절)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를 찾아가 3차례 확인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뼈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네가 젊어서는 네 마음대로 맹세하고, 네 마음대로 부인하고, 네 마음대로 도망쳤지만, 이제부터는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선언하십니다.
예수님과 더이상 ‘간격을 두고’ 제자의 길을 가지 않게 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2)베드로는 하인들과 함께 앉아 불빛을 보고 있었습니다.
(눅 22:55)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눅 22:56)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예수님과 간격을 두고 따라가다가 이제는 아예 하인들과 함께 앉아버립니다.
베드로의 시선은 더이상 에수님이 아니라 ‘불빛’입니다.
정말 시편 1편 말씀의 현장입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다가’, 죄인들의 길에 ‘서게’ 되고, 아예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아’ 버린 것입니다.
그나마 베드로가 자신의 죄를 후회하고 회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통곡할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이었습니까?
1)베드로가 예수님의 시선과 마주쳤습니다.
(눅 22:61-62)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심히 통곡하니라
(시 17:8)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사랑하는 열방가족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간격을 좁히는’ 크리스챤이 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과의 시선을 마주치려고 노력하십시오.
2)베드로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눅 22:61-62) 베드로가 주의 말씀…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기회가 될 때마다 말씀을 먹으십시오. 말씀의 성벽을 쌓으십시오. 그 순간에는 왜 그래야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위기를 만났을 때, 유혹을 받을 때, 시험을 당했을 때 ‘떠오르는 말씀’이 힘이 됩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께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회개하기를 원하고, 눈물 흘리기를 원하여도 ‘떠오르는 말씀’이 하나도 없으면 그는 쉽게 주님께 돌아가기 힘듭니다.
급하게 먹고, 이해없이 먹은 말씀일지라도 ‘진리의 성령’을 영접하는 순간 ‘깨달아지는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요 16: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요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