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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목사는 ‘오홀라’가 아니라 ‘오홀리바’와 같은 존재이기에, 더 큰 ‘하나님의 진노’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에스겔 23:1-49)
에스겔 23장에는 두 여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홀라와 오홀리바 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음행하는 짓거리를 배워 남편을 저버린 사마리아와 에루살렘을 상징합니다.
오홀라가 남편인 하나님을 버리고 앗수르와 행음한 이유가 5,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색옷, 고관, 감독, 준수한 청년, 말 타는 자’ 곧 세상적 기준으로 좀 잘 나간다는 사람, 돈 있다는 사람, 힘이 있다는 사람을 하나님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더 큰 죄는 사실 이것입니다. 남편을 두고 음행을 저지른 것도 있겠지만, ‘그들의 모든 우상’으로 자신을 더렵혔던 것입니다.
(겔 23:7) 그가 앗수르 사람들 가운데에 잘 생긴 그 모든 자들과 행음하고 누구를 연애하든지 그들의 모든 우상으로 자신을 더럽혔으며
자, 이런 음행한 죄를 저지른 오홀라를 목격한 동생 오홀리바의 생동은 어떠하였습니까?
오홀라보다 음욕을 더하며, 오홀라의 간음함보다 더 심하고, 더 부패하였습니다.
(겔 23:11) 그 아우 오홀리바가 이것을 보고도 그의 형보다 음욕을 더하며 그의 형의 간음함보다 그 간음이 더 심하므로 그의 형보다 더 부패하여졌느니라
하나님께서 왜 오홀리바가 오홀라보다 더 음행한 아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1)오홀리바는 앗수르와 연애하다가 더 멋진 바벨론이 나타나자 그들과 음행을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2)오홀리바는 바벨론과 연애하다가 어릴 적 연애하던 애굽과 음행을 저지르기 시작합니다.
3)특별히 하나님께서 오홀라가 앗수르와 음행하여, 음행의 대상이었던 앗수르에게 멸망당하는 것을 보고도, 정신을 못차리고 더 악한 죄를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음행의 죄를 벌리게 된 결정적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홀리바가 남편인 ‘하나님’을 잊버렸기 때문입니다.
(겔 23:35)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을 출애굽하게 하시고 이스라엘백성에게 결혼 프로포즈를 하셨습니다.
(출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그때 마치 결혼식에서 주례자의 질문에 대답하듯이, 이스라엘백성이 다음과 같은 맹세를 하였습니다.
(출 19:7-8) 모세가 내려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들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프로포즈를 하셨습니다.
(고후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사랑하는 열방가족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약혼자입니다.
예수님 오실 때까지 ‘정결한 처녀’로 신랑되신 예수님을 기다립시다!
우리가 ‘단 한번’이라고 생각하고 음행을 저지르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음행으로 쇠한 여인’은 비록 쇠할지라도 ‘그가 그래도’ 행음을 저지른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술보다, 마약보다, 도박보다 더 중독되면 헤어나올 수 없는 것이 음행입니다.
정신차리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갑시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읍시다!
(겔 23:43) 내가 음행으로 쇠한 여인을 가리켜 말하노라 그가 그래도 그들과 행음 하는도다
오를 설교제목을 이렇게 잡아보았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와 목사는 ‘오홀라’가 아니라 ‘오홀리바’이기에, 더 큰 ‘하나님의 진노’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슨 의도로 이렇게 지었을까요?
오홀라라는 이름의 뜻은 ‘장막을 소유한 여자’ 입니다.
곧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이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우상의 장막’을 세운 북이스라엘과 사마리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오홀리바라는 이름의 뜻은 ‘장막이 그녀 가운데 있다’입니다.
곧 ‘하나님의 장막이 함께 거하는 처소’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성전 예루살렘이 있는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상징합니다.
다시 설교제목을 설명하면 이러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우리는 이미 오홀라가 아니라 오홀리바와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몰라서, 예수님과 결별하고, 우리 마음대로 우상을 섬기는 북이스라엘이나 사마리아와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약혼을 하고, ‘뉴저지열방교회’라는 예수님의 몸에 속한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에서 늘 신랑되신 예수님을 만나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경배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꼭 오홀리바처럼 오홀라가 저지르지 않는 죄를 저지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홀리바가 앗수르와 연애하다가 더 멋진 바벨론이 나타나자 그들과 음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의 신부가 되었는데, ‘하나님보다 예수님보다’ 세상의 욕망과 정욕과 야망과 늘 음행하며 살지 않습니까? 교회를 더럽히고 있지는 않습니까?
적어도 오홀라는 그런짓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땅에는 예루살렘성전과 같은 성전이 없어서 벧엘과 단에 자기 맘대로 성전이라고 짓고, 레위지파가 아닌 자들이 제사장일을 하게 했으니 하나님과 상관없는 죄를 진 것입니다.
그냥 악한 ‘사람들’이었지, 오홀리바처럼 ‘남유다 또는 예루살렘성전을 섬기는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와 목사 그리고 성도들의 모습은 적어도 오홀라보다는 오홀리바와 같지 않겠습니까?
아무곳에 장작을 치고, 우상을 숭배하는 사이비집단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피값으로 사신 교회에서 예배를 주관하고, 교회를 섬기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더 큰 하나님의 진노가 기다리고 있음에 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오홀리바처럼!
오늘 하루 단 10분만이라도 십자가 앞으로 나아갑시다!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묵상합시다!
그리고 신랑되신 예수님을 다시 기억하고, ‘두 마음’을 품지 말고 ‘마음을 성결케’ 합시다!
(약 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