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e_sNrNc-hIQ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가?
‘高談峻論’ 아니면 ‘一死覺悟’
(욥 13:1-28)
욥기 13장은 12장에 욥기 11장에서 소발이 욥의 말 많음을 보고 욥이 의롭지 않다고 규정한 것에 대한 반론입니다.
내용은 크게 2가지입니다.
1-12절은 이제 더 이상 친구들과 변론하지 않고, 하나님과 변론하겠다고 선언한 이후에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고, 13-28절은 하나님께 나아감에 있어서 욥의 마음가짐입니다.
이 부분을 사자성어로 정리하면 ‘高談峻論’과 ‘一死覺悟’입니다.
1)고담준론의 뜻이 무엇입니까?
문자적 해석은 ‘뜻이 높고 바르며 엄숙하고 날카로운 말’이지만, 의미적 해석은 ‘아무 거리낌 없이 잘난 체하며 과정하여 떠벌리는 말’을 뜻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질리도록 교만함과 무지함과 무례함과 불의함을 욥에게 쏟어버렸습니다.
그런 친구들과의 대화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욥은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욥은 하나님께 나아가면서 두 가지를 부탁드립니다.
첫째는,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말아주십시오. 곧 욥을 치시는 하나님의 손을 거두어 달라고 말합니다.
둘째는,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곧 욥은 자신을 두려워 떨지 않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2)일사각오의 뜻이 무엇입니까?
한번 죽는 인생 결심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신사참배 거부를 하던 주기철목사님의 인생철학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욥은 일사각오의 생각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냥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을 각오를 하고 나아갑니다.
‘무슨 일이 닥치든지 내가 당하리라’ (13절)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15절)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15절)
‘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16절)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일사각오의 신앙을 보여주셨습니다.
(히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자 ‘일사각오’, 한번에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를 살리셨습니다.
사랑하는 열방가족 여러분, 우리는 살다보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선택하게 됩니다.
고담준론의 사람들로부터 무례함과 무지함과 불의함과 교만함을 경험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우리의 창조자이시고,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나아가서 인생의 문제를 풀어가시기를 원하십니까?
요한일서 5장 14절 15절을 보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붙잡고 오늘 하루도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요일 5: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요일 5: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1/13(금) ‘새벽이슬 말씀’의 짧은 퀴즈를 보내드립니다.
오늘은 욥기 13장 말씀입니다.
‘영상과 글’을 꼭 보시고 퀴즈를 풀면 말씀에 더 큰 유익이 있습니다.
정답이 ‘아닌’ 것이 무엇입니까?
1)욥의 친구들은 고통중에 있는 욥에게 高談峻論 곧 ‘아무 거리낌 없는 잘난 척’으로 상처만을 주었습니다.
2)욥은 더이상 친구들과 고통의 문제를 상의를 하지 않고 一死覺悟의 신앙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3)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一死覺悟 자신의 목숨을 ‘단번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히 9:28)
4)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담대히 나아가서 ‘나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든지 들어주십니다. (요일 5:14)
(개인적으로 생각해보세요)
나는 어떤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갑니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인데, 어떤 각오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히 9:27)
우리가 주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다면 ‘기도’ 하십니까? (요일 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