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rmv4QJm-ntE
‘숨어계신 하나님의 時空間 을 찾으려는 욥의 변화, 그리고 나의 변화!’
(욥 24:1-25)
욥기 24장은 22장의 엘리바스의 반박에 대한 욥의 재반박의 글입니다.
욥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고난에 무관심해 보이시는 하나님께 ‘어느때까지’ 이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질문합니다.
그리고 더불어서 ‘개인의 고통’에 대하여 외치던 욥에게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이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타자의 고통’입니다.
좀더 정리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러합니다.
1.욥기 23과 24장에 나타난 하나님을 향한 욥의 질문이 다릅니다.
욥기 23장에서는 ‘하나님이 어디계십니까?’라는 질문 속에 ‘공간’ 속에 숨어계신 하나님을 찾고 있었다면, 욥기 24장에서는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질문 속에 ‘시간’ 속에 숨어계신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욥 23:8-9)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욥 24:1) 어찌하여 전능자는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
2.욥기 23-24장 ‘시공간’에 숨어계신 하나님을 찾으려던 욥에게 변화가 생깁니다.
고통속에 발견되는 ‘자신의 악’을 이야기하다가, 욥은 ‘사회구조의 악’을 발견합니다.
욥기 24:2-14를 보십시오. 욥은 가난한 자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사회적 압제에 의하여 고난받는 자들의 리스트를 자세하게 나열합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지금까지 욥은 오롯이 ‘자신의 고통’에만 주목었고, ‘자신만 고난받는다’고 주장했었는데, 그러던 욥이 ‘고난 받는 이웃’을 보게 됩니다.
집과 가축을 빼앗기는 사람들, 빚을 갚지 못해 팔리는 사람들, 가난하기에 자신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악착같이 일해도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 돈 없고 백 없어서 아무도 하소연을 들어 주지 않는 사람들…
3.한 사람의 고난이 ‘끝나 가고 있는지 아닌지’ 판별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나만 아프다’고 , ‘왜 나에게만 이런 고난이 있느냐’고 소리치는 사람은 아직 고난의 끝이 오지 않은 것입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보이면서, 그들의 고통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다면 그때가 고난의 끝이 오는 시기입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이 타인의 고통과 다르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절벽 끝에 서 있는 주변 사람들의 고통을 봅니다. 고통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임을 발견합니다.
4.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스’는 이렇게 욥을 설명합니다.
“가난과 버림받음이 자신만의 일이 아니라는 인식의 구체적인 결과로써 이제 근본적으로 변한다.”
욥이 내 고통에 함몰되지 않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그 고통에 연대하기 시작하자 그는 고난을 통과해 나갑니다.
고난받는 다른 사람을 내 고난으로 돕는 사람이 자신의 고난을 해결받듯이, 타자의 고난에 눈이 뜨여진 욥의 고난이 서서히 끝나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 나만 고난을 겪느냐’고 대들던 욥은 ‘왜 저 사람도 저런 고난을 겪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 내밀려고 합니다. 이제 욥에게 고난의 끝은 머지 않았습니다!
5.오늘 설교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숨어계신 하나님의 時空間 을 찾으려는 욥의 변화, 그리고 나의 변화!’
이제까지 욥의 변화를 보았습니다.
‘개인의 악’에서 ‘사회구조의 악’으로 시선을 돌릴 줄 알게 되었습니다.
‘개인의 고통’ ‘자신의 고통’만 보다가 ‘타자의 고통’ ‘이웃의 고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공감’에서 시작해서 ‘연대’를 통해 고난의 문제가 해결되어져 갑니다.
나의 변화는 무엇일까 질문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답을 어제 책삶(책 읽는 삶) 강사로 오신 윤석길 교수님의 글에서 찾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바울신학을 강의하셨는데, 마치 욥을 강해하고 난 후에 적으신 글처럼 느껴졌습니다.
윤석길 교수님의 글을 읽고 ‘나의 변화’에 대한 기대와 결심을 해 봅니다.
하나, 우리 열방교회가 자기 의에 기반한 편협한 확신에 빠져 사회로부터 지탄받으면서까지 불량복음을 생산하지 않기를!
둘, 서슬퍼런 권력에는 단호했으나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겐 비록 죄인일찌라도 사랑하셨던, 약하고 소외된 분들을 환대하여 그들 곁에 기꺼이 서주셨던, 그리고 버려진 사람 취급당하던 이들에게 합당한 새로운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셨던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드러나는 따뜻한 구원의 복음을 겸손히 실천하기를!
셋, 교회가 하나님에게 버림받아도 안 되지만, 사람들에게 버려지지 기에, 혐오와 배제, 증오, 약한 자에 대한 폭력과 억울한 이들을 향한 조롱을 버렸던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기억하고 ‘타자의 고통’에 관심을 갖도록!
위의 글을 쓰다보니 더욱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마음, 몸을 본받고 싶습니다.
(빌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1/25(수) ‘새벽이슬 말씀’의 짧은 퀴즈를 보내드립니다.
오늘은 욥기 24장 말씀입니다.
‘영상과 글’을 꼭 보시고 퀴즈를 풀면 말씀에 더 큰 유익이 있습니다.
정답이 ‘아닌’ 것이 무엇입니까?
1)욥기 23장과 24장은 모두 ‘숨어계신 하나님’을 찾는 내용으로서, 욥기 23장은 ‘하나님이 어디계십니까?’라는 ‘공간의 질문’이고, 욥기 24장은 ‘하나님 어느때까지이니까?’라는 시간의 질문을 다룬 글입니다.
2)욥기 24에서는 ‘욥의 변화’를 볼 수 있게 되는데, 이제까지 ‘자신의 고통’에만 주목하던 욥이 ‘타자의 고통’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런 현상은 ‘고난의 끝’에 다다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3)욥은 ‘개인의 악’에서 ‘사회구조의 악’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사회구조의 악’과 ‘개인의 악’에는 어떤 연관성도 없습니다. ‘사회구조의 악’ 때문에 ‘개인의 고통’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4)빌립보서 2장 5-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하여 ‘사람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사람의 죄가 해결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과 몸을 본받아 고통받는 자들의 마음을 ‘공감’하고, 그들의 고통에 ‘연대’ 하는 작은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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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생각해보세요)
‘고통’이 끝나가고 있다는 ‘증거’의 하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오직 ‘나의 고통’에만 묶여있습니까?
아니면 ‘이웃의 고통’에도 시선을 돌리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