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iK0prXFgJ-o
(전목사야) ‘인간의 계략’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략’을 따라 목회하자!
(삼하 17:1-14)
사무엘하 17장 1-14절의 이야기는 아히도벨의 계략과 후새의 모략을 들은 압살롬이 아히도벨이 아니라 후새의 의견을 채택하여 다윗의 생명을 구원하는 내용입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기습공격으로 다윗의 마지막 숨까지 끊어버리자고 제안합니다. 그 말을 들은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그 말을 옳게 여겼습니다.
(삼하 17:4)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그 말을 옳게 여기더라
그런데 갑자기 압살롬은 후새를 불러 그의 생각도 듣자고 제안합니다.
후새는 압살롬에게 기습공격이 아니라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백성을 동원하여 정면승부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후새의 의도는 도망치는 다윗에게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신비하게도 압살롬과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후새의 모략에 동의합니다.
(삼하 17:14)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
어떻게 아히도벨의 계략을 지지하던 압살롬과 이스라엘장로들이 후새의 모략을 지지하는 데로 마음이 바뀌었을까요?
성경은 두 가지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후새의 계략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자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된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고,
둘째, 암논을 죽이고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압살롬의 죄를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이 부분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다가 달라스 윌라드의 책 ‘하나님의 모략’이 떠올랐습니다.
“오늘날 예수를 한 인간으로서 흥미를 갖고 대하거나 예수가 자신의 현실 생활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일반적으로 그분은 현실의 이슈를 다루는 현실의 인물로 간주되지 않는다.
우리가 부딪쳐야 하는, 그것도 지금 부딪쳐야 하는 세상이 아닌 저만치 허공의 영역에 관심을 둔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솔직히 능력 많은 분으로 통하지도 않는다.” (P.17).
현대 크리스챤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성경이고, 현실은 현실이다라는 이원론적 사고가 아닙니까!
성경의 말씀은 구약시대, 신약시대의 유산이지, 오늘날 지금 나의 현실적인 결정에 대해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매일 아히도밸의 계략과 후새의 모략과 같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계략과 하나님의 모략을 듣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성경이 성경되게 할 수 있을까요?
달라스 윌라드의 말입니다.
(P.17) 나의 희망은 예수님의 말씀을 새롭게 듣게 하는 것이다. 특히 그분을 이미 안다고 믿는 이들에게 그렇게 하고 싶다… 이미 그분을 안다고 믿는 가상의 친숙함이 생소함을 낳았고 생소함은 경멸을 낳았으며 그 경멸은 심각한 무지를 낳았다.
왜 우리는 무지할까요? 미련할까요?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생애, 예수님의 십자가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제대로 모르면서도 이미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착각하다보니 가상의 친숙함이 생기고, 그러다가 버려집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부르셔서 사용하셨습니까?
미련한 자, 약한 자, 천한 자, 멸시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예수님만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열방가족 여러분, 아히도벨의 계략이 아니라 후새의 모략을 들으십시오. 사탄의 계략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략을 채택하여 살아가십시오.
우리의 자녀들이 옳은 길로 갈 수 있도록 후새처럼 하나님의 모략을 나누는 부모가 되기를 원합니다.
다윗의 나라를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후새가 돌아가 남겨졌듯이, 열방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남겨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축복받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