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bAzr-0xLHSo
(전목사) ‘자식을 위해 죽겠다고 말하지 말고, 자식을 죽이지나 말아라!’
(사무엘하 18:24-33)
사무엘하 18장 24-33절 이야기는 압살롬의 죽음을 다윗에게 전하는 스토리입니다.
제게 주신 레마의 말씀은 세 가지입니다.
1.첫째는 ‘좋은 소식’은 ‘좋은 사람’이 전한다는 것입니다.
(삼하 18:27) 파수꾼이 이르되 내가 보기에는 앞선 사람의 달음질이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의 달음질과 같으니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하니라
사독의 아들을 평가하는 다윗의 이야기가 부러웠습니다.
사독의 아들을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좋은 소식’을 전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설교자인 나로서는 ‘좋은 메시지’를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점점 더 내가 ‘좋은 메신저’가 되어서 ‘GOOD NEWS’ 기쁜소식을 성도들에게 잘 전해야겠다는 소망을 갖게됩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2.둘째는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리더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삼하 18:28) 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아뢰되 평강하옵소서 하고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이르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의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삼하 18:29) 왕이 이르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하니라
다윗의 군사들은 오로지 다윗을 위하여 압살롬의 군대와 전쟁을 하였습니다.
압살롬의 군사가 20,000명 정도가 죽었다면, 분명히 다윗의 군사들에게도 많은 사상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히마아스가 전쟁승리의 소식을 가져왔을 때, 다윗은 먼저 아들의 안부를 묻기 전에, 군사들의 생명상태를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아히마아스는 전쟁의 승리를 ‘하나님 여호와께 찬양으로’ 올려드린 반면에, 다윗의 첫마디, 첫관심은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입니다.
목사로서 이런 죄(?)를 범하지는 않았나 돌아봅니다.
성도들의 안부를 묻기보다는 내 자식, 내 가족, 나를 위한 목사는 아니었는지 스스로 회개합니다.
목회가 나의 사적일이 아닌, 하나님의 공적 일인 것을 다시한번 되새겨봅니다.
하나님, 붙잡아 주십시오!
딴짓, 딴생각 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3.셋째는 ‘자식을 위해 죽겠다’는 부모는 많은데, ‘자식을 죽이는’ 부모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삼하 18: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다윗은 슬피울며 이렇게 통곡합니다.
‘내아들 압살롬아’
미안하지만, 좀 안타깝다 못해, 불쌍합니다.
자식을 잃어버린 아버지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아닙니다.
이런 마음입니다.
‘다윗, 네가 압살롬, 내 자식을 죽여놓고, 압살롬을 위해 울어?’
압살롬이 왜 죽었습니까?
이미 예견된 일입니다.
다윗의 간음죄로 암논이 죽고, 다윗의 살인죄로 압살롬이 죽었습니다.
다윗때문에 압살롬이 죽었고,
다윗이 압살롬, 자기의 아들을 죽인 것입니다!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being able to die instead and trying to die instead.
대신 ‘죽을 수 있다’는 것과 대신 ‘죽으려고 했다’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다윗은 아무리 후회해도, 압살롬을 위해 대신 죽어줄 수 없습니다.
다윗은 애초에 암논이, 압살롬이 죽지 않도록 자신의 몸을 거룩하게 지켰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와 우리 자식들을 위해 죽어주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해주셨습니다. (롬 5:6-8)
예수님은 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까?
어떻게 그 사랑을 확증해주셨습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기에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죽으셨습니다.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공의라는 히브리어에는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미슈파트 (mishpat)라는 단어는 법적 의미가 더 강한 공의를 뜻합니다. 반면에 체데크 (tsedeq)라는 단어는 Divine Justice 사랑이 있는 공의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케데크 곧 사랑이 있는 공의를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열방의 부모님들이여, 저를 포함해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좋은 부모’가 됩시다.
공과 사를 구분하는 영적리더가 됩시다.
자식을 살리겠다고 하면서 자식을 죽이는 어리석은 ‘삶의 형태’를 바꿉시다!
특별히 우리의 자녀를 살리셨고, 또 살리시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자녀들에게 예수님을 먹여주는 부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