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uDF40EGXBgg&ab_channel=AllNationsChurch
‘말씀은 말씀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아니다!’
(열왕기상 16:29-34)
1.ORATIO(비움)
->PRE-KNOWLEDGE 비웁니다.
2.MEDITATIO(채움)
->LOGOS-LIFE, LIFE-LOGOS 되게하소서
<1> 관찰
->열왕기상 16:29-34 말씀은 두 덩어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이야기는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북이스라엘의 7대 왕에 올라서 했던 행적에 관한 것이고,
두번째 이야기는 벧엘사람 히엘이 여리고성을 쌓다가 맏아들과 막내아들의 생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두 이야기를 읽다보면,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건이 함께 기록되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이 두 이야기의 주제는 ‘말씀은 말씀이고, 현실은 현실이다’를 반영한 것입니다.
1)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긴 아합 (29-33)
(왕상 16:31a)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가)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31)
(왕상 16:31b)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나)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음(32)
(왕상 16:32)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다)아세라상을 만듦(33)
(왕상 16:33a)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라) 결국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게 함(33)
(왕상 16:33b) …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2)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성을 건축(34)
가)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이 죽고
나)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읽음
다)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어짐
(왕상 16:34)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2> 새김
1)아합이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게 된 원인이 무엇일까요?
가)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었어도 그 금송아지를 두고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제사를 드리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합은 아예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 우상에게 제사드리도록 하였습니다.
(왕상 12:28-29)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나)여로보암의 길이 아니라, 더 악한 길을 가게 된 이유는 솔로몬처럼 ‘이방여인과의 결혼’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의 큰 두 주제인 ‘왕이 누구인가’에서 하나님 대신에 바알과 아세라를 왕으로 섬겼고, ‘섞이지 말라’에서 아합은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해서 바알을 왕으로 섬기게 된 것입니다.
다)엣바알의 뜻이 무엇입니까? ‘바알과 함께 한 자‘라는 뜻입니다. 또는 ‘바알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세벨은 바알과 함께 하는 아버지 밑에서 바알의 여자가 되었습니다. 그녀와의 결혼을 통해 아합은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2)아합이 왜 이토록 죄짓는 것을 중단하지 않을까요?
열왕기상 16:29을 보니 아합이 사마라아에서 통치한 기간이 22년이었습니다.
나답 2년, 엘라 2년, 시므리 7일, 오므리가 12년 왕으로 통치한 기간을 모두 합쳐도 22년이 안됩니다.
죄를 지어도 왕성하다는 착각을 통해 여리고성 사건이 생긴 것입니다.
“말씀은 말씀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결국 그렇게 생각하고 여리고성을 재건하려도 히엘의 맏아들과 막내아들은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현실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물론 불행한 모습으로
(수 6:26)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
말씀을 관찰하고, 묵상하면서 개인적으로 감사한 것은 ‘여로보암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인 내가 여로보암이 될 수 있다’라는 경각심을 하나님께서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는 자꾸만 성령님의 지적에 대해 찔리면서도 동의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전목사, 네가 아합이 될 수 있고, 벧엘사람 히엘이 될 수 있다!’
정말 어렵네요. 여로보암이 나라고 하신 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바알과 아세라를 섬긴 아합과 제가 어떻게 다를바 없다고 하시는지….
다만 ‘죄악과 섞이지 말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한 것이나, ‘왕이 누구냐’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바알과 아세라를 왕으로 섬긴 아합과 비교할 때, 저 역시 큰 죄인임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오직 주님만 나의 왕으로 모시고 살지 못한 죄를 회개합니다!”
“하나님, 죄의 모양이라도 섞이지 말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죄를 회개합니다!”
“특별히 하나님, 여리고성의 경고를 알고도 재건하려다 죽는 비극이 제게 없도록 지켜주십시오!”
“말씀은 말씀이고, 현실은 현실이다라고 타협하여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붙잡아 주십시오!”
“특별히 목회는 목회이고, 현실은 현실이다라고 변명하며 추가하게 살아가다가 하나님을 노엽게 하지 말게 하시고, 자식들로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저를 꽉 붙잡아 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