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13-34)
(관찰)
요한복음 9:13-34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눈을 뜨게 된 이야기의 후속입니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눈을 뜨게 된 맹인을 바리새인에게 데려가는데 그 이유가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기고 그의 눈을 고쳐주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끼리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한 바리새인이 눈을 뜬 맹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16a)
그러자 다른 바리새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죄인으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16b)
바리새인이 눈을 뜬 맹인에게 질문합니다.
“예수를 어떤 사람이라 생각하느냐?”
“선지자입니다!”
바리새인은 눈을 뜬 맹인의 부모에게 똑같이 질문하자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 아들이 맹인이었는데 눈을 떴습니다. 그러나 누가 어떻게 뜨게 했는지 모릅니다!”
(요 9:20-21)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부모들은 아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분이 예수님인 것을 알았음에도 자신있게 증거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 하였기에 그들을 두려워했습니다.
(요 9: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바리새인은 눈을 뜬 맹인을 다시 불러 두번째 심문을 합니다. 그러면서 먼저 바리새인이 예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24절)
그러자 눈을 뜬 맹인이 이렇게 증거(testimony)합니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25절)
이 부분을 읽고 관찰하고 묵상하다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미 예수는 안식일 법을 어겼기에 죄인인데도 ‘죄인인지 알지 못한다’ 고백하고, 더 나아가 ‘나는 그로 인하여 눈이 떴다’라고 담대히 간증하는 것입니다.
“One Thing I Do Know, I was Blind but Now I See!”
바리새인이 다시 눈을 뜬 맹인에게 질문합니다.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26절)
그러자 눈을 뜬 맹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27절)
너무 통쾌합니다. 눈을 뜬 맹인은 이제 ‘회당에서 출교를 당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아니 도리어 자신의 증거를 듣고도 계속해서 질문하는 바리새인들의 영성을 깨우려는 듯한 도전을 듣게 됩니다.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바리새인들이 눈을 뜬 맹인에게 욕을 합니다. 자신들은 모세의 제자라고 반박합니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눈을 뜬 맹인이 예수가 어떤 분인가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30절)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31절)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32-33절)
아주 강력한 증거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눈을 뜬 맹인이 바리새인과 대화를 하면서 더욱더 견고하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증거하다가 확신을 갖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저주하고 눈을 뜬 맹인을 쫓아냅니다.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새김)
말씀을 관찰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세 인물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첫째는, 표적을 보면서도 끝까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 완악한 바리새인들입니다.
눈을 뜬 맹인을 보면서 분명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를 보았는데도 ‘눈을 감아’ 버리는 부류입니다.
둘째는, 표적을 보면서도 자신에게 어떤 해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마음으로는 인정하지만 끝끝내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지 못하는 눈을 뜬 맹인의 부모와 같은 부류입니다.
셋째는, 육신의 눈을 뜨고 난 후에 영적인 눈까지도 뜨게 된 나면서부터 맹인과 같은 부류입니다.
이런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이 맹인은 정말 예수께서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에 대해서 행복했을까?”
물론 행복했겠죠!!
그런데 이로 인해 잃어버린 것들도 많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회당에서의 출교는 확정적이구요,
출교되었다는 것은 유대공동체의 모든 기득권을 다 빼앗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의 담대한 증거를 볼 때 어떻게 이러한 확신이 생겼을까 또 다시 질문이 생겼습니다.
1)첫째는, 맹인은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하여 맹인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 맹인이 된 것’이라는 무거운 형벌로부터 자유케 되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2)둘째는, 예수의 사랑의 터치입니다. 말로만으로도 능히 고칠 수 있으신 예수신데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신’ 그의 터치하심이 맹인의 마음을 터치하신 것입니다.
3)셋째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눈을 뜬 맹인은 예수의 말씀의 명령을 들었고, 순종했을 때 눈 고침 받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물론 체험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순종했을 때 얻게 되는 역사를 더 강조하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9:13-34 말씀을 더욱 관찰하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기도하면서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게 하실 말씀에 대하여 더욱 기대하며 기도합니다.